아직까지 대선 TV토론이 이슈?
여론 조사 기관의 통계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어제 결과에 따르면 이재명 후보와 윤석열 후보의 지지율이 동율을 기록했다. 형님 문제로 시끄러운 이재명 후보와 아내 문제로 힘겨운 윤석열 후보 그리고 아직 털리지 않은 안철수 후보 모두 위태위태 해 보인다. 이제 선진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뽑는데, TV토론 방식이 아직도 논의해야 할 대상이고, 참여 여부를 물어야 한다니 답답하다. 우리나라에서 대선 TV토론이 도입될 뻔했을 때는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었던 92년 대선 때였다. 당시 김대중 후보는 TV토론을 강력히 원했다. 반면 김영삼 대통령은 쨉을 날리며 살살 피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TV연설만 가능해졌고, 김영삼 대통령이 아주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대통령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모두에게 알림
김영삼 대통령 제임 시절은 목표 설정 성공의 화두가 있던 시대였다.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최선을 다해 달성하게 해야 한다는 불굴의 의지를 높게 평가하던 시절이었다. 진보 보수의 개념이 없이 그냥 보수적인 사회에서 선거라는 방식으로 대통령을 뽑던 시절이었다. 김영삼 후보는 자신을 설명할 때 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곤 했다. 국민학교(초등학교) 때부터 자신의 꿈은 대통령이었다고 이야기했다. 대통령 김영삼 이라고 자신의 책상 위에 붙여 놓았다고 한다. 친구들이 보고 놀려도 그는 그 푯말을 절대 떼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그러한 의지가 정치를 매우 일찍 시작하게 만든 것 같다. 그는 25세에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연소 당선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단신 농성으로 유신정권에 맞서는 대표 정치인이 되다
유신시대 박정희 대통령은 대부분의 정치 활동을 제한했다. 김영삼 후보는 야당 지도자로서 정치활동이 가능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었다. 거의 집에 갖혀 있는 상황에서 그는 농성을 시작한다. 마하트마 간디가 영국의 폭정에 대항하여 단식 투쟁을 했던 것을 따라 단식 농성을 시작했다. 그의 단식 투쟁은 지지세력을 결집시켰고, 지지기반이 더 커지는 효과와 더불어 김대중 외에 다른 선택지를 국민에게 주는 효과까지 있었다. 거의 죽을뻔한 상황이 되어서야 그는 단식 투쟁을 멈췄다. 독재정권에 목숨 걸고 대항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1980년 그는 자연스럽게 강력한 대선주자가 되었고, 시간은 걸렸으나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삼당 통합 - 야당에서 여당으로
김영삼 후보의 정치력은 헌정 역사 중 최고라 생각한다. 노태우 대통령은 여당 조차 제대로 장학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대통령 당선 후 많은 어려움 속에 놓이게 된다. 탱크로 반대세력을 밀어낼 수 없고, 자신의 인기로 눌러 버릴 수도 없었다. 강력한 차기 대선주자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각각 자신의 정치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엄청난 스펙의 선거 전략가들이 각 당에 즐비하게 되었다. 아직 그 상황에 대한 파악이 안 되었던 노태우의 민정당은 대통령 선거 직후 시행된 국회의원 총선에서 참패하여 국정운영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정국 주도권이 어느 한쪽으로 몰린 것은 아니었으나, 김대중의 평민당은 호남의 강력한 지지기반을 배경으로 제1야당의 위치를 점령하는 기염을 토한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김영삼, 김종필은 제1야당의 위치를 빼앗겼고, 여당과의 협상에서 늘 2차 3차로 밀려야 하는 상황에서 자당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다.
정계 개편의 스타트는 김대중과 김영삼의 협상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이미 대선 패배의 원인이 두 후보 간 단일화 실패였다는 것을 알았던 두 세력은 힘을 합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김영삼의 민주당은 주도권이 자신들에게 오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영남은 둘로 나뉘어 있어서 하나로 뭉쳐 있는 호남과 경쟁하기 어려웠고, 수도권의 의석 중 야당 국회의원은 대부분은 평민당 소속이었다. 민주화 세력이라는 정당성을 제외하면 김영삼 세력은 정권에서 오히려 멀어질 수 있었다. 노태우의 민정당은 강력한 차기 대선 주자도 없었다. 그래서 김종필과 김영삼이라는 강력한 후보를 흡수할 필요가 있었다. 박태준을 키우기 위해서도 두 걸출한 정치 9단의 가정교사가 필요했다.
김영삼 세력은 이 모든 것이 계산되었다.
조직장악
민주당에서 민자당이 된 김영삼은 자신의 사람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일을 시작했다. 박태준은 순진하여 자신의 사람은 자신의 밑에 계속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신이 깨끗하고 욕심부리지 않으면 자신의 밑에 사람들이 몰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당선될 수 있는 지를 차분히 설명해 주는 김영삼 세력은 선출직에 대한 부담을 늘 안고 살아가는 정치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표적으로 정호영을 잡았다. 그는 군사 세력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국회의원으로 당선을 원했다. 부산에서 9번 당선된 김영삼은 정호영을 정치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김영삼은 정치인을 발탁하고 그 사람을 당선시키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민주당일 때는 노무현을 비롯한 재야 인재들을 대거 영입했고, 민자당일 때는 이명박을 비롯한 경제계 인재들을 대거 영입했다. 그리고 당선시켰다. 인재를 발탁하고 당선시키는 역량은 민자당 내 군사 세력을 도태시키고 민주계 인사가 당을 장악하게 하는 힘을 만들어 냈다. 장기집권을 노렸던 노태우 세력이 내각책임제를 성사시키려 했으나, 권력을 차지하고 싶었던 김영삼은 대통령제를 지켜 냈다. 민자당 내 조직을 완전히 장악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조직 장악력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IMF 직전까지 그를 사랑받는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아쉽게도 숫자에 약하여 IMF 사태를 일으킨 대통령이 되었으나, 아직도 그의 민자당은 국민의 힘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대한민국을 주름잡고 있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방법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목표를 정확히 설정했고, 위기의 순간을 목숨을 걸고 정면 돌파했으며, 조직을 완전히 장악하여 자신의 세력이 정권을 잡도록 했다. 대통령의 역량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의 문제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이라 생각한다. 자신 목표를 위해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의 힘으로 최선을 다하였지만, 힘에 부쳤을 때 적도 이용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게다가 나중에는 적을 누르고 적과 함께 만든 조직을 자신의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재명, 윤석열, 안철수가 갖지 못한 조직 장악력을 가졌던 김영삼의 역량이 그립기도 하다.
'영화 드라마 예능 예고 줄거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민의힘의 선거전략, 민주당의 선거전략 (0) | 2022.02.18 |
---|---|
대통령이 될 사람 : 일곱 번째 대통령 김대중 (0) | 2022.02.01 |
대통령이 될 사람 : 다섯 번째 대통령 노태우 (0) | 2022.01.24 |
대통령이 될 사람 : 네 번째 대통령 전두환 (0) | 2022.01.24 |
대통령이 될 사람 : 세 번째 대통령 박정희 (0) | 2022.01.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