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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문제 해결

영화 한산, 한산대첩... 임진왜란 3대 대첩, 우리나라 전쟁 3대 대첩,

by 줄그결 2022.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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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뽕영화 명량을 잇는 한산

우리나라에서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인물은 누굴까?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일 것이다.

특히 이순신 장군은 일본으로부터 우리나라를 보호하고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끌었다.

기득권을 만들어 지배하려 했던 장보고와 다른 충신이었고,

마음만 충신이었던 이들과 달랐다.

 

 

임진왜란 3대 대첩

한산대첩

한산대첩은 임진년 7월 이순신장군이 이끈 조선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선을 전멸시켜 60척의 배를 침몰시켰던 전투였다. 

이전투를 계기로 임진왜란 수전의 주도권은 조선으로 넘어왔다. 

왜군이 지상으로 한양 이북까지 진격했으나 이 전투로 보급로가 차단되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진주대첩

1차전은 1592년 10월 3만의 왜군을 진주 목사 김시민이 끝까지 진주성에서 이겨냈던 전투였다. 이때 의병장 곽재우가 합세하여 화약물과 돌로 왜군을 물리쳤다. 의병과 관군의 협력으로 왜군을 이겨낸 전투엿다. 2차전은 1593년 6월에 있었다. 이때 왜군이 표면적으로는 이겼으나, 의병 고종후 강희열 등 모두 전원 전사하면서까지 항전했기 때문에 왜군의 피해가 막심하여 후퇴하게 되었다. 이 전투를 계기로 거의 전쟁의 국운이 조선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행주대첩

행주대첩은 1593년 2월 전라 순찰사 권율이 한양을 되찾기 위해 북진하다가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크게 이긴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는 군인들 뿐만아니라 백성들까지 총동원되어 전투를 치뤘다. 동원된 부녀자들이 긴 치마로 돌을 날라 석전을 벌였는데, 이때 사용된 앞치마를 행주치마라 불린다.  

 

 

 

우리나라 전쟁 3대 대첩

살수대첩 

612년에 있었던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 중 살수에서 을지문덕 장군이 기지를 발휘하여 이긴 전투다. 당시 수나라 양재는 고구려를 이기기 위해서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 113만 대군을 요동성에서 고구려 방향으로 이끌고 왔다. 그러나 을지문덕과 고구려 백성들이 기지를 발휘하여 이긴 전투다. 살수강을 막은 후 수나라 군사가 건널 때 수문을 열어 수장 시킴과 동시에 급습으로 승리를 얻은 전투였다. 

 

귀주대첩

1020년 고려를 치러 왔던 거란을 강감찬 장군이 살수대첩과 비슷한 방법으로 압록강 유역에서 승리를 거둔 전투다. 고려 건국 이후 한반도 북부의 힘을 고려와 거란이 거뤘는데, 귀주대첩을 계기로 큰 타격을 입은 거란군이 고려에 더는 대규모로 공격하지 않았다.

 

한산대첩

1592년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이 여러 지역에서 일방적으로 승리를 거둔 반면 육지에서는 조선군이 계속 폐전하였는데 해상의 수군은 전열을 정비하여 가덕도와 거제 부근에서 떼를 지어 이순신을 공격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 앞바다로 일본 수군을 유인하고 학익진 전법을 펴서 일본 왜선을 완전히 격퇴시킨 전투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왜군의 보급로가 차단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3대 대전

명량대첩

영화 명량의 배경이 되는 전투다. 신은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며 끝까지 왜군과 맞서겠다는 의지로 수백척의 왜군 전함과 겨뤘던 전투다. 이 불가능한 전투는 이순신 장군과 전라도 수군 그리고 백성들이 힘을 모아 이룩한 대승이었다.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왜군의 함선이 물의 흐름으로 갖히게 만들고 적들이 혼란한 틈을 타 적 수군의 우두머리를 처치하면서 승리를 이뤄낸 엄청난 승리였다.

 

한산대첩

영화 한산의 배경이 되는 전투로 우리나라 3대 대첩 중 하나다.

 

노량대첩

노량대첩은 이순신장군의 마직막 전투이면서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다. 전력 손실 없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왜군, 괜히 많은 인명피해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명나라 해군, 그리고 전쟁의 말미에 죽고 싶지 않았던 조선군 틈에서 얻어낸 승리다.

이순신은 왜군이 그냥 돌아가면, 반드시 그 전력을 다시 만들어 쳐들어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전의 전투와는 달리 지형지물과 협공 보다 거의 정면승부에 가까운 전투를 벌였다.

이순신 장국께서는 이 전투를 마지막으로 전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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